오랜만에, 길에서 울었다.
명동의 풍경은, 크게는 그대로인 듯 분주하고 부산스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빠르게 변한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리고 스무살이 되자마자 2월, 아직 내가 이십대가 됐다는 걸 실감 못하며 떠나올 때까지. 여고생의 지갑이야 뻔하기 때문에 이곳저곳 소소한 추억이 묻은 구석들이 많았다. 이런 소소한 구석들은, 빠르게 변한다. 명동이 아직도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건, 거기서 삼년을 꼬박 보낸 내가 한 번도 가지 못한, 여전히 가지 못한 그런 곳들이 이전부터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자주 다니는 명동이지만, 막상 모교에 들어가려니 괜히 낯선, 내가 다니던 시절 있었지만 지금은 요즘의 '유행'에 맞춰 바뀐 가게들을 보며 익숙한 풍경 속의 아쉬움이 차올랐다.
내 학교도 명동을 오래 지킨 것 중 하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고, 내가 다닐 때 그랬고, 당연히 내가 늙어서까지도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내 친구들에게서 "졸업생인 엄마 따라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꼭 보내고 싶은 학교가 그곳이었고, 늙어서도 계속 오고싶은, 서울토박이에 잠실벌에서만 26년을 살아온 내게 유일하게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찡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 그 학교는 그렇게 몇 년의 논란을 뒤로하고 약 70년의 명동시대를 곧 마감하게 됐다. 서울시의 관광특구 정책, 학교 운영의 효율화, 입시 결과를 위한 무언가와 학교의 미래,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 라고는 한다. 너무 화났던 시간도, 너무 슬펐던 시간도 지나 정말 이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이 되니 좀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학교에 들어서, 내가 입었던 그 촌스러운 교복이 아닌 화사한 원피스교복을 입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나를 가르쳐주셨던, 키워주셨던 선생님들의 손을 잡고, 건물에 들어섰을 때 났던 그 '학교 냄새'. 그게 뭐라고 울먹임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와 가슴을 쳐댔다. 울만 하면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들이 여전히, 이곳에 계신 선생님들이 아는 척 해주셔서 웃음이 나와 울지 못했지만. 많이 달라졌지만 또 많이 그대로였다. 건물마다, 매 학년의 기억이 서려있는 공간들, 1학년 그 추운 겨울에 아침에 굳이 달리기 시키던 담임선생님이 참 야속했는데 그 생각도 나고, 급식먹으러 뛰어나가던 길, 아이들 생일마다 케잌과 장미꽃 챙겨주시던 선생님, 영자신문반, 학생회실, 가장 좋아했던 양호수녀님 뵈러, 몸이 아니라 마음만 아파도 여러 핑계대며 가곤 했던 양호실과.
계성여고는 천주교 학교라 매년 5월, 성모 성월을 기념하며 성모의 밤 행사를 연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뒷뜰 가득한 아이들과, 나처럼 무언가를 추억하거나 무언가가 반가운 졸업생들과, 가득한 촛불과, 노래와 기도. 새로 옮길 학교는 해당 지역의 남학교 부족으로 남녀공학이 된다. 계성여자고등학교는 내년까지고, 그 이후엔 계성고등학교로 새로 출발한다. 그래도 모교는 모교지만, 그런 행정적인 것들보다 이 냄새가 사라진다는 것, 마음 한 구석을 도려내는 기분이 들었다. 슬픔보다, 서글픔보다, 무언가 다른, 설명하긴 어려운. 하물며 중국매미 잡던 생각, 옥상에 만들었던 정원, 명동에 처음 크리스피크림 생겼을 때 저녁 대신 먹으러 뛰어나갔던 생각, 별 별 생각이 머리를 휘젓다가, 고3을 보냈던 그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경험.
여기저기 미친듯이 눈에, 마음에, 카메라에 담고, 아주 오랜만에 성모의 밤과 그 촛불을, 봤고, 노래를 조용히 따라불러봤다. 선생님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나는 다시 세상 모르고 꿈만 많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자꾸 눈물이 올라오는데 참고 참았다. 결국 학교에서 나오고나서, 명동 길거리 한복판에서 울어버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곧 사라질 이 학교 냄새, 태어나서 잃어버린 것 중 어쩌면 가장 큰 일일 것 같아서 자꾸만 마음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가 이사해도, 명동이 내 고향 같을까. 성당에 안가면서도 괜히 명동성당 근처만 가도 모든게 해결되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들이 밀려와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하나 예쁘지 않은 때가 없는 이 곳. 사진은 길준광선생님께서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두신 가을의 종현언덕.
-원 글은, 2014년 5월 성모의 밤에 페이스북에 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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