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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2013

직업과 직장

by __stella 2013. 5. 22.



어쩌다가 생각지도 못한(건 아니었지만 어쩄든 첫 직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서 심지어 연구원이라는 신분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글 쓸 시간도 없이 허덕이며 엑셀이나 두드리고 통계자료와 각종 정부 예산을 들여다보고 잘 하지도못하는 영어로 영국 보고서를 파악하고 정리해야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엄청 관심있었던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내가 다루는 데이터들이 꽤나 흥미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건 학부 출신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사무보조'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처우가 매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업무 시간 대비 여러가지 복지 상황이나 근로 환경이 좋은 편이고, 겨우 사무 보조 수준이라고 해도 제한된 정보를 다루는 일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일해보고 싶었던 곳에 좀 더 일찍 발을 들인 것 뿐이지만, 게다가 다시 학생(은 아니고 원생이겠지만)으로 돌아갈 근미래를 생각하면 매우 한시적인 일이지만 그럼에도-와 핑계길구나-썩 성취감은 없다.


이곳에 출근하게 됐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었나, 우리 분야에서는 사실 어쩌면 '절대갑(아, 절대값은 아니다)'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니-물론 내가 하는 업무나 내가 속한 실의 업무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이쪽 분야에서 내가 다니는 곳을 떠올리면 흔히 생각나는 이미지는 '절대갑'이니까-게다가 그냥 졸업하면 대체로 대기업에 취업하는 우리 과의 특성상, 교수님들도 정말 뛸듯이 기뻐하셨었는데, 


그놈의 '내 일'과 '회사 일'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다니는 곳에서도 물론 박사 급이 된다면, 회사 일이 곧 내 일이고, 회사 이름의 결과물이 곧 내 결과물이자, 내 결과물이 회사의 성과일테니, 절대적으로 '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일게 학부 출신의 연구원인 나에게는, 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내 일은 절대적으로 회사 일에 귀속된, '내 일'인 그 분들의 부속같은 그런 일인 것이다. 성취감이 없을 수밖에. 


그게 내가 그토록 '무조건 기자'를 하고싶었던 이유였다. 물론 기자도 마찬가지겠지, 가까이서 봐서도 알지만, 그리고 오랜 시간 비스끄무레한 짓을 해와서도 알지만, 기자라고 내가 쓰고 싶은 기사만 쓸 수도, 내가 하고시은 취재만 할 수도, 그럴 수는 없다. 회사에서 원하는 기사, 회사에서 내고 싶은 기사를 써야하고, 그렇게 써대면서 밥 벌어먹고 산다. 그래도 여전히 기자가 최종적인 목표인 내게 "그럼 네가 지금 하는 일과 기자가 뭐가 다른데"라고 묻는다면, 나는 과감히 '바이라인'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내가 쓰는 기사는 내 이름으로 나가니까, 야근을 해도 내 기사를 위한 야근인 건데, 물론 회사가 원하는 기사가 내 이름을 걸기에 정말로 부끄러운 기사일 수도 있겠지만, 늘 그런 것이 아니라면야, 이왕 회사의 소모품이 될 것이라면야, 내 이름이 남는 일을 하고싶은 거다. 일종의 공명심일 수도 있겠지만, 뭐 밥벌이라는게 다 그런거라고 하니까.


엑셀 배워두면 나중에 반드시 쓸모가 있겠지, 그래서 열심히 배우면서 찾아가면서 하고는 있는데, 엑셀공부 좀 하라는 잔소리가 그렇게 나는 힘들다. 한 명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나를 찾고 일을 시키는 그런게 아직 요령이 없어서인지 쉽지는 않다. 사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어쩌면 대기업이 더 할텐데 말이다. 그놈의 성취감이 뭔지, 나는 겨우 성취감만 있으면 신나서 일하는 그런 존재였나보다, 내가 그 숱한 마감을, 그렇게 힘들면서도 그렇게 신나게 견뎌냈고, 그 피로가 내 나름의 훈장같았던 걸 보면.


지난 해 디지털타임스 면접에 갔을 때다. 멀쩡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필기시험을 봐 면접에 온 한 여자 지원자에게 사장이 물었다. (그 사장이 그 알리 아버지였지.) "왜 좋은 회사 그만 두고 기자하려고 하냐"고. 그러자 그 언니가 했던 대답이 아직도 남는다. "직업과, 직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던 것. 


나는 직업을 갖고싶다. 직장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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