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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2013

by __stella 2013. 1. 20.

가장 가고싶었던 회사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고 나서 찾았던, 안면도 바다. 2013년 11월. 


꿈은 꿈이라서 예쁜 걸까, 하는 생각을 요즘 문득, 한다. 꿈을 이뤄서 현실이 되면, 그게 꿈꿀 때만큼 예쁠까, 싶어서. 어릴 때부터 많은 꿈을 꿨고, 많은 꿈이 물거품이 됐고, 그 중 일부는 이루어졌고, 지금도 또, 꿈을 꾸고 있지만 아직도 모를 일이다.


무슨 꿈을 꿔왔나 생각해봤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가장 길었던 것 같고, 막연히 ‘음악 하는 사람’ 이 되고 싶었던 적도, 짧진 않았던 것 같다. 구름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싶었던 적도 꽤 길었다. 그 중 어느 정도는 다른 현실적인 꿈과 중첩돼 있었지만. 미술을 하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 미술사나 건축사를 공부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아! 고등학교 때는 법의학자가 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다. 지금? 이 난수와도 가까운 꿈의 변천사 중, ‘취업준비생’인 나는 사실상 ‘기자 지망생’이다. 기자를 꿈꾸고 있다는 거다.


생각해 보면 난 참 어릴 때부터 글을 써왔다. 정말 어릴 때부터 썼다. 일단 내가 기억하는 건, 어릴 적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당을 다니던 시절에 ‘작은 마음’이라는 어린이용 주보에 내 글이 실렸던 적이 있다. 그게 첫 번째로 내 글이 어딘가에 실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힌 기억이다. 그 이후엔 ‘과학쟁이’라는 초등학생용 과학 잡지에 인간 복제에 대해 과학 윤리적 측면에서 짧게 썼던 글이 실렸다. 지금에서야 ‘인간 복제에 대해 과학 윤리적 측면’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는 거지, 사실상 그냥 초등학생 수준에서 ‘인간 복제가 일어나면 생길 여러 복잡한 문제’에 대해 짧게 쓴 글이었다. 그 때 상품으로는, 콘센트에 꼽는 무당벌레 모양의 미니라이트를 받았다. 한 번도 써본 기억이 없는데, 나한테도 없다. 그게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요즘도 추세가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어린이 신문은 소년조선일보와 소년한국일보가 ‘투톱’이었다. 3학년 때부터였나, 막연하게 ‘5학년이 되면 꼭 어린이 기자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생각을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도저히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멋있어 보였나. 여튼, 난 5학년이 되었고, 소년한국일보 비둘기 기자가 됐다. 그리고 아마 내 바이라인을 달고선 기사가 두 개 정도 나갔던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는 축구부 기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스스로 쓴 첫 기사였고, 그게 어떻게 한겨레 신문사로 넘어가서 서울청소년동아리한마당의 유일한 초등학생 기자로 그 축제의 기자가 됐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서울청소년동아리한마당 학생기자는 7명 남짓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 두 명에, 오빠 네 명 정도였고, 지금은 예술인의 길을 걸으며 뉴욕에서 매일 멋진 사진을 올리는 모 오빠만 중학생이었고 다른 언니오빠들은 모두 고등학생, 그리고 내가 혼자 초등학생이었다. 5일 동안 과천 서울랜드로 취재를 다녔고, 계속 한겨레 B섹션에 기획 기사가 나갔었다. 마지막 날 회식은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 근처의 중국집에서 풀 코스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태어나서 아마도 처음으로 중식 코스요리를 먹어본 때가 아니었나 싶은데, 다른 건 기억이 안나고 누룽지탕이 엄청 맛있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당시 담당 기자였던 한겨레 신문사 모 기자님은, (어서 언론인이 되어 “선배! 저 기억하세요?”라고 여쭙고 싶다.) 지난 해였나, 바이라인을 보고 메일을 드렸더니 “10년 전쯤 똘똘한 초등학생 하나 알았던 것 기억이 난다”며 “기자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다니, 그때 생각하면 놀랍지 않으면서도 놀랍다”고 하셨다. 감사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한겨레 신문에 초등학생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과학 실험’용 실험 기구를 학교 차원에서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기고를 하게 됐는데, 그 기사를 인연으로 KBS 뉴스에도 나왔었다. (생각해보니, 나 그때부터 좀 소질이 있었던 건가.) 그 기고를 하고선 원고료로 5만원인가를 받았고, 난 동네 새마을금고에 어린이용 통장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원고료를 받고는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아, 역시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었나보다.) 그리고 선물로 한겨레 신문사에서 출간한 몇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아직도 환경전문기자로 재직 중이신 모 기자님이 쓴 과학 에세이 책이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팔로우하고선, 깜짝 놀랐다. 이 분이!


아, 5일 간의 동아리한마당 취재 끝에는 서울랜드 자유이용권이었던가, 빅3 이용권을 받았던 것 같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에 듀얼 액정 폰이 처음 나왔던 때였고, 하얀 폴더에 뚜껑에 있는 액정 색이 변하는 폰을 가진 언니가 있었는데 그게 참 예뻤다. 자이로드롭같은 기구를 타려고 샌들을 벗는 언니들을 보며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언니들은 참 어른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여고생들이다. 내가 과외 했던 아이도 대학생이 된 지금 그 시간을 떠올려 보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5일 간 서울랜드로 취재를 다니면서, 매번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탔는데 그 때마다 늘 상체는 건장하지만 다리를 못 써서 팔로 짚어 지하철 칸을 넘나들며 구걸하는 청년이 있었다. 어른들이 “인물도 훤한데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내 기억엔 상체가 건장했던 실루엣 뿐이지만 인물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튼, 5일 째 되던 날, 이제 더 이상 서울랜드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 감상에 젖어 ‘이제 저 아저씨도 못 보겠네’라고 생각했다.


그 아저씨가 팔로 땅을 짚어 겨우 역에서 내리고, 지하철은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고, 내 시선은 지하철에서 팔을 이용해 겨우 내리던 그 다리 못 쓰는 청년에게 향했는데, 지하철이 다음 역으로 출발하자, 내가 탄 칸이 그 자리를 지나가자 갑자기 이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키도 엄청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당시 키가 158cm 정도였는데, 그걸 생각하면 그 아저씨는 분명, 건장했다. 그것도 매우. 그리고 구걸한 얼마 안 되는 돈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가 탄 칸도 빠르게 다음 역을 향해 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열두 살짜리 꼬마였던 내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공부 잘 하던 중학교 때는 사실 별로 꿈이 없었다. 외고에 진학하는 게 유일한 꿈이었나. 아니 사실 가장 음악을 하고싶다고 생각했던 시기다. 음악 들으면서 채보하고 그랬다. 물론 아주 쉽게 저지당했고, 난 그때 내 꿈이 ‘포기 당했다’ 혹은 ‘좌절당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고, 내가 내 성적이 분명 아까웠던 게 틀림없다. 정말 하고싶었다면, 난 분명 무슨 일을 저질러서라도 했을 거다. 난 원래 하고싶은 건 해야하는 성격이다. 이제야 안 거지만, 그때 내 꿈은 그만큼 간절한 꿈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다.


고등학교를 멀리 갔다. 뒤에 다시 쓰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외고 진학을 포기하고, (물론 이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계성여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처음엔 순전히 입학 당시 치렀던 시험의 영어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난 외고에 진학하려고 준비했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감사하게 그 영어가지고 아직도 먹고 살고 있다. 이럴 때보면 조기 교육이 나쁜 것도 아니다.) 영자신문부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는다. 동아리인데도 다른 동아리처럼 무섭지 않고, 일단 언니들이 너무 좋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영자신문부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1학년 때는 학생기자로, 2학년 때는 어쩌다 편집장을 맡아서, 그렇게 지냈다. 고2 때, 편집장이 해야 할 그 막중한 임무를 떠맡고, 마감을 하고, 퇴고를 하고, 편집을 하면서 “난 대학 가면 절!대로 마감 있는 동아리는 안 할 거야. 절대 마감 있는 걸로 먹고 살지 않을거야!” 라고 수십 번은 외쳤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이게 내 팔자일 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스무 살 겨울, 처음 진심으로 진지하게 기자를 꿈꾸게 되고선 이 생각들을 짚어봤고, 어쩌면 좀 ‘운명’ 인가 생각했다. 아니, 난 정말로 하고 싶은데, ‘운명론적’으로 내게 온 꿈이라고 하면, 뭐랄까 좀 없어보이기도 하고, 나의, 이 진짜 하고싶은 마음이 별로 느껴지지가 않잖나. 그래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봤다. “그래서, 하기 싫었어? 그냥 상황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냥 해왔나?” 라고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물어봤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어릴 땐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이, 바이라인에 내 이름이 나오는 게 그냥 막연히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크면 클수록, 내 글에 대한 책임감이 생길수록, 난 내 글을 쓰는 게 좋아졌고, 그 스트레스 가득한 ‘마감’이 은근히 재밌었다. 사실 지금도 그래서 변태라는 이야기를 좀 듣곤 하는데, 난 아직도 마감이 재미있고, 스릴 있고, 좋다. 마감 스트레스가 주는 긴장과 긴박감, 그리고 그 순간에 발휘되는 나의 집중력에 아드레날린이 나오는 기분이라고 하면, 역시 좀 변태 같긴 하지만.


그렇게 스무 살 겨울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기자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양대 동문회보, 싸이월드 뮤직, 멜론 뮤직스토리, 엘르 앳진을 거쳐, 드디어 꿈꾸던 과학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한, 한겨레 사이언스 온, 한국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웹진까지.


많은 곳에 글을 썼고, 많은 종류의 매체를 경험해봤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고, 특히 그게 단순히 경력을 위한 일이 아니라 ‘먹고사니즘’과 연관됐을 땐 더 그렇다. 사실 오늘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래서 힘들다. 지금 ‘꿈’은, 부디 공부나 일이나 하나만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내가 여태 해온 일이 꼭,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는 것, 그게 내 지금 꾸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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