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주준영의 표정. 선배 너는.
'가치 판단이 모호해질 때 가장 명확한 기준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
현석 오빠가 '좋아요' 해서 보게 된, 나는 모르는 어떤 분의 포스팅. 내가 지금 어쩌면 아주 약간의 번뇌를 겪고, 결국 다시 언시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된 것도, 결국 내 삶을 살아가는 건 나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찌질하다. 다들 "네가 왜"라는 반응을-예의든,진심이든-보이지만, 보이는 만큼 당당하거나 자신감있지 않다. 내가 조금만 더 예뻤다면? 조금 더 좋은 학교를 다녔다면? 부모님께 좀 더 손벌릴 만큼 좀 더 뻔뻔하고 철이 없었다면? 아나운서 아카데미라도 다녀봤다면? 공중파는 아니어도 케이블 채널 정도는, 사실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했던 것도 아니었고. 대학교 졸업 후 그냥 놀면서-물론 그들은 대학 다닐 때도, 돈 걱정 안하고 신나게 놀기도 했고 사고싶은 물건도 주저없이 샀지만-그러면서도 집에선 가장 예쁜 딸이고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고 취직을 안 하는 상황에 대해서 전혀 평가받지 않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나도 부럽다. 그리고 결국엔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나보다 그들이 더 좋은 출발선을 갖게 되리라는 것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결국 그렇게 된대도 그들 조차도 훨씬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그런 부러움은, 당연히 남과 비교하는 나의 찌질함, 내 찌질함 탓이다.
출근을 해서도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이런 꿀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나는 마음이 자꾸만 아등바등하다. 내가 이렇게 물러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내가 하고싶은 일은 이것이 아니고, 안주하면 안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닌데. 그렇게 편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바쁘다. 바빠 죽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사는 세상>의 주준영에게 그렇게도 감정이입이 됐던 건, 어쩌면 그런 맥락이다. 언젠가 페이스북에 한 번 남겼던 리뷰이기도 한데, 주준영. 명문대를 졸업해 공중파 방송국 드라마 PD로 일하고 있는, 고집이 강하지만 사실 상처투성이라 이걸 고집으로 방어하는 그런 여자.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주준영의 그 말도 안되는 고집과 가끔의 폭발과 가끔의 애교와 가끔의 슬픔이 그저 공감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주준영이 가진 상처 전반에는 돈은 많지만 천박한-뭐 교양 없는 정도로 해둘- 엄마와, 교양있는 문학쟁이 대학교수 아버지-결국 나중엔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난-에 대0한 어마어마한 컴플렉스가 박혀있다. 드라마틱한 가족사 때문이 아니라, 80년대 태생이라면 가질 수 있는 흔한 중산층-부동산-콤플렉스라고 생각한다. 아니, 80년대 태생이라서 가질 수 있다기 보다 그 이전 태생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콤플렉스를 과장되게 극화해둔 것이다. 부동산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마지노선이었던, 80년대태생들의 '부모세대'는, 그렇게 부동산만 가져도 신분상승이 가능했기에, 조금의 괜찮은 판단이라면 쉽게 중산층이 될 수 있었다. 극 중 주준영의 엄마처럼 친구들을 불러 고스톱이나 치고, 싸구려 국밥집에서 설렁탕이나 먹으면서도 백화점에서 수백 만원 어치의 옷을 긁을 수 있는 것. (물론 극이라서 과장했지만, 그 오차 범위 내에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교양과 적당히 먹고 살만한 부를 동시에 가진 집도 많기야 하지만, 특별히 이렇게 '부동산 키즈'가 된 80년대 태생에게는 이 중산층 부모와 중산층 생활이 충분히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 있으며, 결국 그의 성장과정이 상당한 농도의 '전문직 워너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극중 주준영은 "그렇게 천박한 엄마가 부끄러웠고, 엄마를 벗어나기 위해 공부했어. 대학을 좋은데 갔으니까 집 얻어서 나올 수 있었고, 직업을 얻었으니까 이렇게 살아"하고 울며 소리친다. 타고난 먹고 살 만한 돈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떨어진 부모의 교양에 대한 콤플렉스가 똘똘 뭉친 부동산 키즈에겐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고 무조건 전문직이 되어 그 교양까지 꿰차, 완벽하게 털고 일어나는게 성장과정의 최대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크도록 결국 부모의 부동산에서 나온 월세가 자신에게 투자됐다는 건 생각도 안한 채로. 나는 그래서 <그사세> 주준영의 이런 행태를 "전문직 부심 쩐다"고 말하는 70년대 태생 전문직 여성에게 크게 반박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의 글을 썼던 거고. 70년대 태생이 '우골탑 뒷바라지'의 마지노선이라면, 80년대 태생은 아예 다른 밥을 먹고 자라서, 아마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극에서 과장된 만큼의 무교양과 천박함은 분명 현실과 거리가 있겠지만, 유사한 이유에서 나는 무조건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다. 애초에 대기업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내 이름이 내 일이 되는 그런 일을 하고싶었다. 적어도 끝까지 내 일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는 전문직이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수능을 망치고 현실과의 간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생각은 훨씬 커졌다. 결국 나는 다시 언시를 할 것이고, 어떤 매체가 될 지 모르지만 기자로 살 것이다. 기자가 그렇게 대단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명문대 출신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닌 내가 '그들이 사는 세상'에 편입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목표에는 한 몫 한다. 대단한 언론부심이나, 대단한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어쩄든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가치 판단. 그런 걸 하고 있다는 거다. 남이야 뭐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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